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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춤, 생각이 시작되는 곳/사회, 정치 이야기

전국 법관 대표 회의, 5개 안건 모두 부결의 의미

by 생각에서 마음으로 202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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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연 혼란의 문

2025년 5월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이 판결은 명목상 서울고등법원이 다시 심리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등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강하게 유도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그 이유는 대법원이 이례적으로 상세한 법리 판단을 제시하며, 허위사실 공표 요건이 충족되었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등법원에 사실상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법리적으로 파기환송은 하급심이 자율적으로 다시 판단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지만, 현실의 법원 구조에서는 대법원의 법리 지침을 하급심이 거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사 개인의 법리 판단보다 대법원의 해석이 우선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파기환송은 재심리라는 이름의 재확인 절차에 불과한 형식적 반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하급심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정치적 부담은 피하면서 실질적 결과는 관철시키려 했다는 의심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더욱이 문제는 판결이 내려진 ‘시기’ 에 있다. 이 결정은 대통령 선거일인 6월 3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선고되었다. 통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수개월에서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사건은 상고심 접수 후 약 6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극대화되는 시점에, 유력 대선 후보를 겨냥한 ‘유죄 취지’ 판단이 내려졌다는 점에서 사법부가 정치 일정을 의식해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로 대선 전까지 서울고등법원이 파기환송심을 마치고, 유죄 판결을 내린 뒤, 재상고심까지 마무리하여 유죄를 확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대법원의 의도는 판결 자체보다는 유죄 취지를 명문화함으로써 여론과 선거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대법원 판결 이후,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유죄 확정”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했고, 여당은 이재명 후보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선고 시점과 취지가 결합되어 사법적 판결이 정치적 메시지로 전환된 상황이었다.
요컨대,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은 ‘형식은 절차를 따랐으나, 실질은 정치에 기울어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법률적으로는 파기환송이라는 안전한 궤도를 택했지만, 사실상 유죄 확정을 향한 명시적 의도를 담고 있었으며, 그 시기 또한 대선을 겨냥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로써 대법원은 법적 정당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동시에 훼손했으며, 결과적으로 사법부 전체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판결을 남긴 셈이다.

아무 의견도 못내고 빈손으로 끝난 법관회의(일러스트)
아무 의견도 못내고 빈손으로 끝난 법관회의(일러스트)

 

법관회의의 침묵: 내부 견제 기능의 붕괴

이러한 대법원의 결정을 두고 법원 내부에서도 다양한 문제의식이 일었다. 그 결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긴급 임시 회의를 열고, 총 5개의 안건을 상정했다. 하지만 논의 끝에 모든 안건이 부결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안건 자체가 서로 다른 문제의식과 목적을 담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법관사회 내부의 균열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1·2번 안건은 대법원의 졸속 판결을 내부적으로 비판하며, 제도 개선과 공정한 재판 의지 천명을 담았다.
–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
– “사법제도 개선을 위한 분과위원회 설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의도적 조기 선고에 대한 내부 자성의 성격이 강했다.
즉, 사법부 스스로 이번 사건을 반성하고 제도적으로 개선하자는 취지였다.

반면 3·4번 안건은 외부 정치권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
– “사법권 독립 침해 재발 방지”,
– “정치의 사법화 경계”는 대법원 판결 이후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제기된 ‘정치 판결’ 비판에 대한 사법부의 반격이었다.
이 안건들은 사법부 외부로부터의 압박을 견제하며, 정치화되는 사법담론에 대한 선을 긋기 위한 선언적 시도였다.

이처럼 각기 다른 배경과 방향에서 제기된 안건들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성격을 지녔다. 하나는 사법부 내부의 자기반성을 촉구했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비판에 대한 방어를 요구했다. 내부의 잘못을 드러내고 고치자는 시도와, 외부로부터 사법부를 지켜야 한다는 시도는, 결국 서로를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는 모두 부결이었다. 다수 안건이 46표 이상을 얻지 못했고, 표결은 갈라졌다. 이는 법관들 사이에서도 이번 사태의 본질에 대해 통일된 인식이 없었고,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사법부는 대법원의 판단을 두고 내적 성찰도, 외적 대응도 선택하지 못한 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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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문제로서의 사법 위기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단지 특정 판결의 타당성 문제가 아니다. 사법부 전체가 정치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구조적 사례였다. 대법원은 정치 일정을 고려한 듯한 선고로 스스로 중립성을 훼손했고, 법관대표회의는 내부 자정 기능을 상실한 채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특히 대법원의 판단과 법관회의의 침묵은 사법부의 양대 축이 동시에 책임 회피에 나선 것과 다름없다. 그 누구도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고,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대한 의지마저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정치의 도구가 되었음을 부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법부는 스스로 중립이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독립 기관일 수 없다. 정치적 이해와 대중 여론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책임을 지는지가 사법 독립의 진짜 시험이다. 대법원은 그 시험에서 실패했고, 법관대표회의는 그 실패를 아무 말 없이 덮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 사법부의 가장 본질적인 위기다.

침묵은 독립이 아니라 책임 회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내지 못한 채, 다섯 개의 안건을 모두 부결시켰다. 안건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못한 채 침묵만을 남겼다. 이는 중립이 아니라, 책임 회피이며, 스스로 사법의 역할을 거부한 행위였다.

중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중립은 권력 앞에서 법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법은 약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며, 사법은 그 법을 실현하는 실천의 공간이다.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판결과 법관회의의 집단적 침묵은, 바로 그 실천의 공간에서 용기가 사라진 시대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나라는 헌정질서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 사법부는 이 시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편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법부는, 더 이상 국민의 편일 수 없다. 정의는 명분이 아니라 실천이고, 침묵은 독립이 아니라 책임의 포기다. 국민은 더 이상 침묵하는 법원을 신뢰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질 때, 그 책임은 정치가 아니라, 침묵한 사법부가 져야 한다. 이는 한 시대의 정치적 논쟁을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법 체계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깊은 역사적 물음이다. 사법부가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정치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그 용기를 회복하지 않는 한, 사법의 존재 이유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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