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혼란 속으로
고려 말은 단순한 왕조의 쇠퇴가 아니라, 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부패와 국정의 무능이 만연했고, 외부적으로는 원나라의 몰락과 명나라의 부상이라는 국제 질서의 변화가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 공민왕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개혁은 한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추진한 개혁은 신돈을 통한 권문세족 견제, 권력 재편, 친원적 세력의 제거 등이었으나, 이는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신진사대부와 구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공민왕은 1374년 암살당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정치적 공백을 남겼고, 왕위를 계승할 적통 후계자도 불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즉위하게 되는 우왕은 그 출생 자체부터 정통성 논란을 안고 있었고, 이는 고려 왕조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됩니다.
우왕의 즉위와 실권자의 탄생: 이인임의 권력 장악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일설에는 공민왕이 생식 능력이 없었으며, 우왕은 사실상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려 왕실 내부에서도 우왕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며, 이는 훗날 폐위의 명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린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장악한 것은 대신 이인임이었습니다. 그는 권문세족 출신으로, 보수적 귀족 세력을 대변하며 공민왕 시기의 개혁을 뒤집고 자신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국정은 이인임이 장악했고, 우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우왕은 점차 권력을 가지려 했고, 그 과정에서 비이성적이고 방탕한 행동들이 나타났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잦은 주연, 폭력적인 행동, 무책임한 정사 등으로 신망을 잃어갔습니다. 이인임의 강압적 정치와 우왕의 무능은 고려에 대한 민심을 더욱 이반시켰습니다.
최영과 이성계의 부상: 고려의 마지막 충신과 미래의 건국자
이러한 정국 속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최영 장군입니다. 그는 고려 무장으로서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충신이었습니다. 최영은 이인임의 부패 정치를 비판하며 그를 축출했고,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장수가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는 함경도 지방의 유력한 무장으로서, 대몽·왜구 방어에서 큰 공을 세웠고, 중앙 정치에 참여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우왕은 최영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최영의 딸과 혼인까지 맺었고, 이는 일종의 정치적 연합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는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기로에 있었습니다. 원나라가 몰락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며, 명은 고려에 요동지방을 반환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최영은 이에 응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이성계에게 출병을 명령하게 됩니다. 이 결단은 곧 고려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 고려 운명의 분기점
1388년, 이성계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곳은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출정을 멈추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성계는 명과의 전쟁이 명분도 없고, 여름 장마철의 불리한 여건, 군사적 승산 부족 등을 이유로 '4불가론'을 내세워 회군을 결심합니다. 이성계는 단순히 돌아온 것이 아니라, 회군 이후 곧장 개경으로 진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최영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우왕은 폐위되며 정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반란이 아니라, 체제 전복의 서막이었습니다. 고려의 권력 중심은 완전히 이동하였고, 새로운 시대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퇴장, 공양왕의 형식적 즉위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킨 후, 그의 어린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창왕 역시 얼마 가지 않아 폐위되었고, 왕씨 성을 가진 왕족 중 한 명인 공양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공양왕은 스스로도 정통성이나 정치력에 자신이 없었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즉위는 고려 왕조가 실질적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정치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형식적 절차였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지만, 왕권은 전혀 행사하지 못했고, 조정의 모든 결정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주도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 전야: 사라지는 왕조와 다가오는 새 시대
공양왕은 왕위에 있으면서도 이성계의 명령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우왕과 창왕을 사사하라는 지시도 결국 이성계의 의중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공양왕 본인조차도 “백성들은 이미 이성계를 주인으로 알고 있다”는 말로 자신이 허울뿐인 왕임을 자인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무렵 고려 말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는 조선을 반대하며 끝까지 고려에 충절을 바칩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 이방원과의 시문 대결은 한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정치적 대화로 남습니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충신의 상징이 되었고, 이방원의 ‘하여가’는 새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드러냅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고려의 유산과 조선의 이상이 충돌한 역사적 장면이었습니다.
‘회군’에서 ‘혁명’으로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적 철수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체제의 종말을 선언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예고한 역사적 대사건입니다. 고려는 권문세족의 부패, 왕권의 무기력, 외교적 고립 속에서 붕괴하였고, 이성계는 이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단순한 쿠데타로 끝나지 않고,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와 함께 철저한 국가 개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회군은 반란을 넘어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은 정말 새로운 나라였을까요, 아니면 고려의 다른 얼굴이었을까요?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사상, 제도, 이념의 대전환이었으며, 그 변화의 첫 시작점은 바로 위화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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