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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연애, ‘배워야 할 감정’이 되다: 델리대학교 ‘친밀한 관계의 이해와 조율’ 교과목 분석

by 생각에서 마음으로 2025.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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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대학교 ‘친밀한 관계의 이해와 조율’ 교과목 분석
델리대학교 ‘친밀한 관계의 이해와 조율’ 교과목 분석

디지털 친밀감의 시대

인스타그램, 틴더, 유튜브. 우리는 지금 디지털 친밀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클릭 몇 번이면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몇 초짜리 영상이 마음을 흔드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가깝고 빠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심으로 연결되고 있을까요? 관계가 시작되는 속도만큼 끝나는 속도도 빨라지고, 때로는 상처만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언제나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을 뿐, 사랑하는 법이나 이별을 극복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델리대학교의 새로운 교과목

이러한 교육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인도 델리대학교가 2025년부터 전면 도입할 교과목 ‘Negotiating Intimate Relationships’(한국어 번역: 친밀한 관계의 이해와 조율)은 교육의 방향에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집니다. ‘친밀한 감정’이라는 전통적으로 사적인 주제를 공적 교육의 장으로 끌어온 이 시도는, 단지 신선한 실험을 넘어 사회 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필연적인 대응이기도 합니다.

연구 기반의 실천적 교육

델리대학교의 이 교과목은 심리학 전공 학생뿐 아니라 모든 학부생이 이수할 수 있는 4학점 선택과목으로, 학문과 삶의 간극을 좁히는 실천적 내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수업은 주 3회의 강의와 주 1회의 튜토리얼로 이루어지며, 총 4개 단원에서 관계의 전 생애 주기를 다룹니다. 먼저 우정에서 연애로 발전하는 과정과 인간의 애착 심리를 다루며, Sternberg의 삼각이론(열정, 친밀감, 헌신)과 같은 고전 이론을 실생활에 접목해 이해하게 합니다. 이어서 SNS를 통한 의사소통, 틴더와 같은 데이팅 앱에서의 관계 형성과정, 소셜미디어가 형성하는 친밀감의 특징, 그리고 사생활 노출과 경계 설정 문제로 확장됩니다. 마지막에는 이별의 감정적 처리, 상호 존중과 동의(consent)의 윤리, 데이트 폭력의 경계와 예방 전략 등을 학문적으로 다루며, 감정 조절, 경계 설정, 건강한 의사소통 능력 등 정서적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를 강화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위험 요소

이 교과목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인도 사회는 최근 수년간 데이트폭력과 살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왔습니다. 델리에서는 연인 간의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가 반복적으로 보도됐습니다. ‘Komal’, ‘Mehek’, ‘Vijaylaxmi’와 같은 피해 여성들의 사건은 연애 관계가 개인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특히 Z세대는 연애와 소통의 대부분을 SNS와 메신저를 통해 경험하며, 감정이 빠르게 형성되고 사라지는 ‘디지털 친밀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 중심의 소통은 진심을 오해하게 하거나, 때로는 감정 조작(gaslighting), 온라인 스토킹, 사생활 유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디지털 플랫폼과 감정 문제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위기는, 더 이상 ‘가정에서 배울 일’ 혹은 ‘개인의 문제’로 미뤄둘 수 없습니다. 델리대학교는 이 문제를 교육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며, 관계와 감정 역시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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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배우는 과정

이 교과목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관계의 ‘시작’뿐 아니라 ‘끝’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연인과의 이별 후 나타나는 감정 중 ‘회상과 반추(rumination)’를 주요 변수로 봅니다. 반복적인 회상은 고통을 증폭시키고 회복을 지연시키지만, 적절한 인식과 조절을 통해 자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중과정 모델(Dual Process Model)’입니다. 이 이론은 감정에 몰입하는 상실 지향(loss-oriented) 활동과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회복 지향(restoration-oriented) 활동 사이를 유동적으로 오가며 균형을 맞출 때, 건강한 심리 회복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델리대의 수업은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학생들에게 이별을 단순한 감정의 실패가 아닌, 자기이해와 회복력(resilience)을 기를 수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돕습니다. 결국 ‘이별을 겪는 법’ 또한 삶의 중요한 배움이자 감정 리터러시의 일부인 것입니다.

관계 교육의 중요성

관계는 본래 ‘사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사랑이나 이별은 각자의 몫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는 개인을 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정신건강 문제, 범죄, 소외와 자살 등은 대체로 누적된 감정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델리대학교의 ‘친밀한 관계의 이해와 조율’ 교과목은 이러한 사적 감정을 공적 논의와 교육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며, 교육이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정서적 안정, 관계의 윤리, 감정 회복력은 현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핵심 역량이 된 것입니다. 한국 사회 역시 감정 교육과 관계 교육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청소년기부터 연애는 금기시되고, 학교에서는 감정 조절이나 갈등 해결보다는 성적과 진로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어디서나 필수적이며, 감정 리터러시는 이제 삶의 기술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델리대의 실험은 단지 교육과정의 변화를 넘어서, 감정과 관계를 ‘배우는 것’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성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관계를 배우는 세대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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